서울의 정동극장, 무대에 명창 조상현이 올라오고 ‘춘향전’ 공연이 시작된다. 조상현의 소리에 맞춰 화면은 조선 시대의 한 관아로 바뀐다.

단오절, 남원부 자제 이몽룡(조승우)는 방자(김학용)를 앞세워 광한루 구경을 나서고, 그곳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효정)을 만난다. 그날 이후 춘향을 보고 싶은 몽룡은 야심한 밤, 춘향의 집을 방문한다. 몽룡은 춘향 어미 월매(김성녀) 앞에서 춘향에게 ‘불망기’를 써 사랑을 맹세한다. 첫날밤을 보낸 후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 가지만 몽룡은 동부승지 당상하여 한양에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남원을 떠나야 하고, 몽룡과 춘향은 서로의 거울과 가락지를 나눈 후 이별한다. 새로 부임한 변 사또(이정헌)는 남원골 절색 춘향에게 수청 들기를 강요한다. 춘향은 수청을 거부하고, 변 사또는 춘향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고 옥에 가둔다.

한편 한양에서 장원급제한 몽룡은 암행어사로 다시 전라도로 온다. 변학도의 폭정과 춘향의 고초를 알게 된 몽룡은 그날 밤 거지 행색으로 월매와 옥에 갇힌 춘향을 찾는다.

변학도의 생일날,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는 틈에 암행어사 출두가 붙여지고, 몽룡은 변학도를 비롯한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응징한다. 춘향은 풀려나고, 월매와 동네 사람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화면이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오면, 조상현의 소리와 함께 추임새를 넣는 관객들의 소리가 어우러진다.

봄과 청춘의 찬미,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이용철 - 영화평론가

세기가 바뀔 즈음에도 칸영화제는 한국 영화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국제영화제의 위계에서 칸영화제는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와 함께 3대 영화제로 불리는데, 셋 중 칸영화제가 가지는 위상은 미묘하면서도 강력한 것이다.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와 비교해 닫힌 문을 열지 않았던 칸영화제는 2000년, 황금종려상을 놓고 겨루는 경쟁부문에 드디어 <춘향뎐>을 초청한다. 결과론적으로 보더라도 ‘왜 <춘향뎐>인가?’라는 질문은 필요가 없다. <춘향뎐>은 한국영화의 자의식이 폭발하던 시기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박스오피스의 돌풍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일궈냈다. 한국에서도 몇몇 국제영화제가 닻을 올려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대단한 영화 팬이 아니더라도 영화 잡지를 팔에 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금 즈음이면 칸영화제에 도전해도 되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무릇 형성되었을 때, 임권택은 한국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당연히 첫 번째로 거론되는 주자였다. 게다가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서편제>로 대중의 사랑과 주목을 받았던 바, 그들 영화를 제작했던 태흥영화사로서는 임권택 감독과 함께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한국영화사에서 ‘춘향전’은 흥행과 기술 면에서 한국영화사의 여러 기록과 뒷이야기를 보유한 작품이다. 특히, 신상옥과 최은희의 <성춘향>과 홍성기와 김지미의 <춘향전>이 맞붙은 1961년 설 시즌의 대결은 지금도 회자되곤 한다. 그렇게 대중적인 작품이지만, 임권택은 다소 실험적이면서도 어쩌면 마땅한 길을 선택했다. 이 작품을 원전 판소리에 가까운 버전의 영화로 만들겠다는 것. 그의 선택은 그동안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영화 산업을 이끌어온 ‘춘향전’의 여러 시도 중에서도 특별하다 하겠다. 판소리는 익숙한 장르이면서도 현대 관객에게 만만한 대상은 아니다. 우선 사용하는 언어가 현대의 그것과 많이 달라 자막의 도움을 받아야 할 판이고, 창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영화의 관객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판소리 공연 자체를 재현해 일부분을 무대극으로 진행하는 것도 어떤 관객에겐 어색했을 게다. 창을 부르는 조상현도, 명사들이 TV 프로그램을 장식하던 1970, 80년대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라는 점도 2000년대의 젊은 관객에게는 별 관심의 해당 사항이 못 되었다.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의 대화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감독의 염려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임권택이 취한 <춘향뎐>은 옳다. 남도 사투리 특유의 간드러지는 리듬에 몸을 맡겨 보면 그 의미를 절로 알게 된다. 매 대사가 시구처럼 꽃답다. 무릎을 치며 웃다가도 이어지는 장면에선 눈물을 훔치기 마련이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판소리 양식이, 극히 눈부신 이미지와 만나 이룩한 경지는 과연 노장의 이름에 어울리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영화와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장르영화 사이에서 긴장감 넘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임권택은 1990년대 중반, 탐미적인 경향의 작품군에 천착한다.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답해야 한다는 심리도 작용했을 터, <서편제>에서 <축제>, <춘향뎐>을 지나 <취화선>, <천년학>으로 이어지는 작품군이 이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춘향뎐>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탐미, 즉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사라질 것에 대한 곡진한 마음 자세다. 그것이 퇴폐적이지 않은 것은, 가장 찬란한 시기를 곱게 그려내는 것인즉, 삶의 찬미이기 때문이다. 성숙하고 고아한 사랑도 좋지만, 이팔청춘 꽃과 같은 시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임권택의 <춘향뎐>이 목표하는 지점이다. 붉은 잎, 붉은 입술, 그리고 붉은 사랑, 이게 억측이라 생각된다면, 칠순에 다가선 임권택이 무어 부질없는 사랑을 찾아 십 대가 지나기 전의 배우를 찾아 헤맸을지, 질문해 보면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임권택이 해석한 <춘향뎐>은 봄과 청춘의 찬미다. 영화의 초반, 화통한 목소리의 조상현이 어느 단옷날을 배경으로 숨넘어가듯 부르는 노랫가락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 노래는 ‘광한루도 좋거니와 오작교가 더욱 좋다’고 주장한다. 왜 그러한가. ‘오작교가 분명허면 견우직녀 없을쏘냐. 견우성은 내가 되려니와 직녀성은 게 뉘가 될그나’ 가슴 두근거리는 이야기의 시작점인데, 종종 간과하고 넘어가기 십상인 극의 핵심이자 백미다. 누구나 들어보았음직한 사랑가 장면의 요염함이나, 이별하는 장면의 애달픔도 저 출발점이 없다면 공중누각이다. <춘향뎐>의 클라이맥스 또한 수절한 춘향이 득한 절개에 있음이 분명하지만, 거꾸로 판단해 청춘의 아름다움이 바탕이 되었기에 깊고 진실한 가치를 얻는 것이다. 단옷날에 마음을 정한 몽룡은 나귀를 몰아 춘향의 집으로 향한다. 달이 밝은 밤, 방자를 앞세운 몽룡이 춘향의 단아한 초가집 초입에 들어서는 장면의 낭만은 또 어쩔 거냐. 죽어도 지키고 싶은, 그래서 되돌아가 찾고 싶은 게 바로 그런 낭만이다. 이보다 낭만적인 장면은 수천 영화를 뒤져봐도 구하기 힘들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