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시절, 연상의 상사인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젊고 매력적인 캐릭터 '시그리드' 연기로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마리아 앤더스(줄리엣 비노쉬).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연극의 리메이크 버전에 출연 제의를 받게 되지만,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주인공이 아닌 나이 든 상사 헬레나. 리허설을 위해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함께 알프스의 외딴 지역인 '실스마리아'를 찾은 마리아는, 관객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시그리드'로만 남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시그리드’보다 솔직하고 인간적인 ‘헬레나’의 매력을 어필하는 발렌틴과 끊임없이 충돌한다.


BHIFF NOTE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뮤즈라고 하면 으레 연인(전 아내) 장만옥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아사야스의 영화 세계에서 큰 축을 차지한 것은 비노쉬였다. 그녀가 주연을 맡은 <랑데부>(1985), <앨리스와 마틴>(1998)의 각본을 썼던 아사야스는 직접 <여름의 조각들>(2008)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를 연출하면서 비노쉬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배우를 페르소나로 활용하는 법을 제시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세 남매가 유산 분배를 놓고 갈등하는 <여름의 조각들>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고집쟁이 아드리엔으로 변신했다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는 파리에서 훌훌 벗어나 스위스의 알프스산맥으로 떠나는 은막의 스타, 마리아로 돌아온다. 현실과 환상, 무대(연극)와 영화, 스타와 배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위해 아사야스에게 꼭 필요한 마법은 어느새 중년(50세)이 된 비노쉬의 깊은 주름과 한숨이었다.

아사야스는 먼저 자연의 솜씨로 빚어낸 거대한 공간을 상정한다. 영화제목처럼 즉시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구름이 등장하는 곳이다. 말로야 스네이크, 즉 실스마리아의 말로야 계곡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마치 구름이 뱀처럼 계곡을 타고 움직인다(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1818년 회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방불케 하는 숭고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는 동시에 영화 속 발렘 감독의 연극 제목이기도 하다. 무명 시절, 이 연극에 출연한 마리아는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시그리드 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20년 후 그녀는 마치 숙명처럼 연극의 리메이크에 출연해 상사 헬레나역을 맡는다. 영화는 마리아가 고인이 된 감독의 저택에 머물면서 실스마리아의 기운을 품은 채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프리드리히가 대자연 앞에 선 고독한 인간을 다뤘다면 아사야스는 서서히 불안에 잠식되는 스타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알프스의 절경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이 <스트롬볼리>(1950)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선사한 낯선 현기증처럼 열병을 일으키는 주인공이다.

경외의 대상인 말로야 계곡을 배경으로 스타와 그녀의 비서, 두 여성의 권력관계가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하고 있다. 젊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이 마리아의 연기 연습을 돕는 과정에서 이들은 마치 헬레나와 시그리드처럼 현실과 연극(허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급기야 두 사람은 캐릭터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충돌한다. 연극 속 캐릭터들의 상황과 감정에 전이된 것처럼 두 사람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시그리드의 각인(지워지지 않는 과거)을 지닌 채 헬레나를 연기하는 마리아는 계속 의혹에 시달리고, 그녀를 돌보는 발렌틴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른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주인이 노예에 의존하다 자립성을 잃고 지배-복종 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양상은 마리아와 호흡을 맞추게 된 앳된 배우 조앤(클로이 모레츠)과의 관계에서도 연이어 발생한다. 못 말리는 트러블메이커 조앤은 대선배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지만, 막상 함께 연기하자마자 연극 속 시그리드와 헬레나의 관계처럼 우위에 놓인다.

각양각색의 세 배우, 비노쉬를 중심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히로인!)와 클로이 모레츠가 펼치는 연기대결(각기 다른 개성의 경합)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일찍이 잉마르 베르만 감독이 <페르소나>(1966)에서 실험했던 두 여인의 정체성(하나로 겹쳐진 인격)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테면 헬레나/시그리드는 애초에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인물의 양면성처럼 공존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이니그마(수수께끼)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영화의 숨겨진 힘이다. 물론 이 매혹의 산보에는 비노쉬의 숨결이 함께 한다. 그녀는 우리를 실스마리아로 안내하는 황금나침반이다. _전종혁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