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도

사라지는 것들, 살아갈 것들.

BHIFF NOTE

콩 내음 가득한 영화는 제사를 치르기 위해 가족이 본가에 모여드는 짧은 하루로 시작한다. 두부 공장이 가업인 김 씨 집안은 정성껏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손자 성진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족 삼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할머니의 정과 손자가 대를 이어주길 바라는 할아버지의 희망이 손자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은 제사상을 차리면서 웃음꽃을 피우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김승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가부장제를 암시하듯 조상의 음덕을 믿는 할아버지는 유교 문화와 옛 전통을 철저히 고수한다. 그는 운동권 출신의 아들 태근이 하는 일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 호통을 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아들은 인정욕구에 시달리며 아버지와 매사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반면 무명배우인 손자 성진은 두부 공장을 이어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렇듯 세대 갈등이 밥상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쉽게 소통할 수 없는 삼대는 동상이몽처럼 각자 자신의 과거와 상념에 깊이 빠져 있다.

마을의 상징인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장면이 영화 전반부의 화목한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할머니의 실수가 소소한 웃음을 유발하는 이 장면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대가족 시대의 일상을 포착한다.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떠올리게 하지만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단지 가족의 초상만이 아니다. 성진의 고향 마을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공간이자 변화 없는 삶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곳이다. 가족 구성원이 도착과 떠남을 반복하는 이 추억의 공간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거대한 고목이 가족을 기억하고 증언한다). 소란스러웠던 제사가 끝나고 빠르게 각자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간 이들에게 곧 큰 변화가 찾아온다. 평범한 일상을 깨트리는 사건과 예상치 못한 감정의 늪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현실은 우리를 마치 잡초처럼 짓밟는다"는 안톤 체호프 연극의 대사처럼 현실은 가혹하며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가족의 일상과 시간성(인간의 유한성)은 뜻밖의 길로 나아간다.

<장손>은 분주한 삶에서 잠시 벗어나 닻을 내리고 멈춰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짧고 빠르게'가 정답이 되어버린 SNS 시대에 오정민 감독이 내놓은 가족 이야기는 잊힌 혹은 잃어버린 서사의 복원이라 할 수 있다.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 즉 삶 그 자체를 담고 있다. 가족은 존재의 이유이자 여전히 자신의 과거와 현재, 심지어 미래를 연결하는 방향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영화는 마치 광활한 자연 풍경을 축소해 제시하는 미학처럼 가족의 축경(縮景)을 탄탄한 서사로 구축하고 있다. 가족 이야기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나 드라마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곱씹을수록 가족만큼 신비하고 불가해한 소재는 없다. 때로는 서로를 억압하고 상처 입히지만 때로는 기꺼이 품에 안고 치유와 안식을 선사한다. 감독은 대가족의 희로애락을 장황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가족의 온기와 상처(상실)를 함께 체험하게 만든다. 숨겨진 진실이나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삶의 굴곡과 맞물려 미스터리한 색채마저 빚어낸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의 힘이다. 특히 성진의 고향집 풍경은 주인공들의 마음과 감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한마디로 마음의 풍경, 심경(心景)을 그려낸다. 섣불리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절제된 영화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장면을 빚어낸다. _전종혁